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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정보

종로 피맛골에서 ‘맛’은 Taste가 아니라 Horse입니다.

by 초긍정과 초실행 2022. 7. 17.

 

종로에 피맛골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피맛골
피맛골


피맛골. 맛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까, 뭔가 맛있는 곳이 많다는 뜻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피맛골의 맛은 Taste가 아니라 Horse입니다.

 

피맛골은 피마(避馬)+골 말을 피하는 길(로)이란 뜻으로 한자어와 순우리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런데 마(Horse)가 왜 맛(Taste)가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한글 맞춤법에서 사이시옷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사이시옷: 한글 맞춤법에서, 사잇소리 현상이 나타났을 때 쓰는 ‘ㅅ’의 이름. 순우리말 또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 가운데 앞말이 모음으로 끝날 때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따위에 받치어 적는다. ‘아랫방’, ‘아랫니’, ‘나뭇잎’ 따위가 있다.

한자어와 한글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사이시옷이 들어갔고, 


피마골에서 피맛골로 표기가 되었습니다. 뭔가 좀 어색하네요.

 

피맛골의 유래

종로거리
종로거리와 피맛골

조선 초기 경복궁의 위치가 결정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앞에 육조 거리가 만들어졌고,

궁궐을 비롯해서 도성의 각종 생활 필수품을 공급할 시장인 종로가 세워졌습니다.

수백 채의 행랑이 줄지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운종가라는 또 다른 이름도 붙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종로가 경복궁에서부터 창덕궁 앞까지 쭉 이어진 길이다 보니까 고위 관리들의 행차가 잦았던 것입니다.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는 고위 관리가 행차하게 되면

길가의 백성들은 모두 물러나서 고개를 조아리며 지나가길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만약, 앞에서 얼쩡거리게 되면

일단 잡아서 길가의 집에 구금했다가 조사를 해서 처벌하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심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갇혀있을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기 예보처럼 행차 예보 같은 것을 알 수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냥 재수 없이 행차에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고위 관리들의 행차에 지친 사람들은 특별한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바로 말을 피하는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종로의 큰 길 옆에 좁은 골목길을 이용한 것입니다. 

비록 좁다고는 하지만 높은 관리들의 행차 때마다 걸음을 멈춰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피마길은 거의 종로가 만들어진 직후부터 탄생한 길이라고 봐야 합니다. 

알음알음으로 만들어진 길이었지만 편리함이라는 날개를 달고 사람들의 왕래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음식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가게 되었고,

그들을 따라 온 음식점이나 상점들이 속속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피맛골이 음식점 거리가 된 이유

조선시대 내내 말을 피해 다니던 피마길은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청진동 골목길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는데 

1937년 문을 연 청진옥을 비롯해서 해장국을 파는 음식점들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근처에 있는 시장 상인들의 배를 채워주며 명성을 떨치던 청진옥을 중심으로 음식점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광복 후에도 청진옥을 비롯한 해장국 집들은 번창했는데 

주로 1차와 2차를 달린 사람들이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서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청진동 골목길과 접해 있는 피마길들도 각자의 색깔을 지니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탑골 공원과 인사동쪽 피마길은 값싼 안주를 파는 호프집들이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교보문고와 접해 있는 피마길은

열차집과 참새집을 비롯해서 생선구이를 파는 가게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주로 직장인들과 중년층을 위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피맛골의 현대적 재탄생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피마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청진동을 비롯해서 종로 일대가 개발되면서 길이 사라질 뻔했는데, 

피맛골을 현대적으로 살리려는 노력이 피마길을 되살리게 됩니다.


피맛골의 시작점교보문고 광화문점입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중학천을 건너면 우람한 높이의 광화문 디타워와 마주치게 됩니다.

피마길이 있던 곳에 소호라는 이름의 통로가 보입니다.

통로 오른 쪽에는 디타워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나온

조선시대 운종가의 행랑 유적들을 보존해놓은 공간이 보입니다.

유리 바닥에 한옥 지붕을 올려서 잠깐 둘러볼 수 있습니다.

소호 거리 안은 그야말로 깔끔합니다.

이전에 열차집과 참새집을 비롯해서 생선구이 집들이 있었을 때와는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호 거리를 통과해서 종로 3길의 횡단보도를 지나면 르메이에르 빌딩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는 다소 뜬금없이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 피맛골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습니다.

나중에 세워진 광화문 디타워의 소호 거리가 피마길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면

이곳의 피마길은 좀 더 이전의 역사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르메이에르가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래서인지 좀 더 오래된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이곳도 건물 사이를 띄워놓은 형태로 햇빛이 직접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역시 통로가 아니라 골목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진동 해장국을 상징하는 청진옥이 한 때 이곳에 있었습니다.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 골목길

이곳을 지나게 되면 그랑 서울의 청진 상점가와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빌딩들 중에서 피마길에 가장 진심인 곳입니다. 

그랑 서울이 음식점들이 들어선 곳이기 때문에 피마길을 버릴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통로도 길게 조성했고, 나무와 여러 색깔의 벽돌을 조합해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또한 벽체를 나무로 사용해서 벽돌이 주는 딱딱한 느낌도 다소 줄였습니다. 

거기다 트렌디하거나 젊은층이 좋아하는 음식점 대신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포들의 지점을 입점시키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피마길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가져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종각역과 가깝다는 장점까지 겹치면서 사람들의 발걸음도 많아졌습니다. 


피마길에 여러 개의 빌딩이 새로 들어섰는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피마길을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랑서울이 만들어졌을 때는 

노포라고는 하지만 허름하고 작은 노포가 아닌 자본력을 갖춘 노포들이 입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포가 그랑서울 인근 직장인과 요즘 젊은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 있어서,

최근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그랑서울에 사무실이 있었던 적이 있어서 청진옥, 수하동 등 근처 노포를 많이 갔었는데, 

요즘 트렌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과거 말을 피하던 뒷골목에서 머물지 않고,

현대시대의 그 길의 목적과 분위기에 맞게 형태가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종로의 피맛골은 과거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곳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피맛골-르메이에르
르메이에르 피맛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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